수술 로봇이 직면한 근본적 도전…인간과의 경쟁
의료 로봇이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은 ‘인간과의 경쟁’입니다.
공장의 산업용 로봇은 정해진 작업을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반복 수행하면서 가치를 입증합니다.
하지만 수술 로봇의 경쟁 상대는 수년간의 수련을 통해 고도의 지식과 술기, 풍부한 임상 경험을 갖춘 ‘의사’입니다.
환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기계에 맡기는 것에 당연한 두려움을 가집니다.

수술 중 예측 못한 돌발 상황에서 현재의 로봇은 인간 의사처럼 종합적 판단을 내리고 유연하게 대처할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책임과 최종 판단은 인간 의사의 몫입니다.
따라서 수술 로봇은 ‘의사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사의 능력을 확장하고 보조하는’ 도구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현재는 그렇습니다.
남는 거대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비싼 로봇을 사용했을 때 환자에게 돌아가는 명확한 이득이 무엇인가?” 수술 시간 단축, 출혈량 감소, 회복 기간 단축, 합병증 발생률 감소 등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혹독한 경쟁의 장입니다.
◆AI 소프트웨어의 붐, 그리고 소외감
2017년경, 의료계에는 의료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의 붐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의료 영상을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판독하는 AI, 환자의 데이터를 분석해 질병을 예측하는 AI가 속속 등장했습니다.
하드웨어 기반의 로봇을 개발하던 저는 솔직히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AI 소프트웨어에 쏠리면서, 묵직한 기계 덩어리인 로봇은 구시대 유물처럼 뒷전으로 밀려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집과 뚝심으로 로봇이라는 제 영역을 지켰습니다.
물리적인 실행을 담당하는 실체가 없는 AI는 결국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필요한 AI 기술 개발 과제에는 꾸준히 참여하며 바탕을 다졌지만, 로봇 개발에 매진했습니다.
그 기다림이 구체적 방향성을 갖게 된 것은 2018년 ‘인공지능바이오 융합 의료로봇’ 국책과제를 시작하면서입니다.
로봇이라는 하드웨어에 인공지능이라는 두뇌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본격적 고민의 시작이었고, 이는 훗날 제가 창업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hysical AI 시대의 도래
2025년 우리는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 젠슨 황이 주창한 ‘Physical AI’라는 개념이 휴머노이드 로봇의 놀라운 발전과 맞물리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스스로 환경을 인식하고,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두 발로 걸어다니며,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는 휴머노이드의 발전은 충격적입니다.
저는 또다시 묘한 소외감을 느낍니다. AI 소프트웨어 붐 때처럼, 모든 이슈를 휴머노이드가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문 로봇의 존재 이유
하지만 저는 감히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멀쩡한 세탁기를 두고 휴머노이드에게 손빨래를 맡길 이유가 없는 것처럼, 고도로 전문화된 영역에 최적화된 의료 로봇은 앞으로도 계속 존재 이유를 가질 것입니다.”
심장 혈관처럼 미세하고 복잡한 구조를 다루려면 인간의 손보다 더 작고 정교한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수술 중 실시간으로 변하는 해부학적 구조를 정확히 추적하려면 해당 분야에 특화된 센서와 알고리즘이 필요합니다.
범용성을 지향하는 휴머노이드가 이 모든 전문 영역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입니다.
◆실행에서 인식·추론으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수술 로봇은 ‘실행 (Action)’에 초점을 맞춰 발전해왔습니다.
인간 의사가 눈 (인식)과 뇌 (추론)의 역할을 하고, 로봇은 정교한 손 (실행)의 역할을 하는 협업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AI 기술은 로봇에게 인식과 추론의 능력을 부여할 잠재력을 보여줍니다.
로봇 스스로 내시경 영상을 분석하여 암 조직을 구분하고 (인식), 환자 데이터를 종합해 최적의 수술 경로를 계획하며 (추론), 자율적으로 수술 기구를 움직이는 (실행) 시대가 점차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의 장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인간 개입 없이 로봇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스템의 인허가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바라본다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나날이 높아가는 의료 수요와 심화되는 인력 부족, 한정된 사회적 재원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지능을 갖춘 의료 서비스 로봇이 그 역할을 분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외줄 위를 걷는 사람들
오늘도 저는 창업한 회사의 젊고 유능한 직원들과 함께 임상 현장의 수많은 요구사항과 씨름하며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인력으로 복잡도 높은 의료기기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은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임상 현장이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숙제 앞에서 하루하루를 헤쳐 나아갑니다.
1974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는 줄타기에 성공했던 프랑스 곡예사 필립 프티가 생각납니다. 수술 로봇 개발이라는 길은 허공에 놓인 외줄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한 걸음 앞은 성공의 환희이지만, 한 걸음 뒤는 실패의 낭떠러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길의 끝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개발한 로봇이 더 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더 많은 의사의 동반자가 되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부디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강력한 의지를 갖춘 새로운 세대의 개발자들이 많이 나타나, 대한민국이 의료 로봇 강국으로 세계에 우뚝 서는 미래를 열어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사진 : 본원 심장내과와 의공학연구소가 개발하고 교원창업기업 엘엔로보틱스를 통해 임상 실용화 추진 중인 심혈관중재시술보조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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