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속 신장질환자들을 지키는 일 – 재난 신장학 (Disaster Nephrology)의 세계
유경돈 (대한신장학회 재난대응위원회 간사/국제신장학회 재난대응실무그룹ISN RDPWG 위원)
재난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막연한 두려움을 줍니다. 지진, 태풍, 화재, 감염병 유행, 전쟁과 같은 사건들은 단순히 일시적인 충격에 그치지 않고, 삶의 기반과 치료 인프라를 무너뜨리며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합니다.
특히 신장질환자, 그중에서도 혈액투석을 받는 환자들은 재난 상황에서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 대표적인 취약군입니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런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학문 분야, '재난 신장학 (Disaster Nephrology)'에 대해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아직은 국내에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분야지만, 점차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으며, 특히 신장질환을 전공하는 의사들에게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말기신부전으로 투석을 유지하는 환자는 왜 재난에 더 취약할까?
혈액투석 환자는 일반적인 재난 상황에서도 단 2~3일만 치료를 받지 못해도 생명이 위급해질 수 있습니다.
투석이란 체내의 노폐물과 수분을 인공적으로 제거하는 생명유지 치료이기 때문에, 정기적인 투석이 중단되면 고칼륨혈증, 폐부종, 요독증 등이 빠르게 발생할 수기위계속있습니다.
문제는 재난이 발생하면 인공신장실 자체가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정전, 단수, 도로 단절, 건물 붕괴, 감염 격리 등은 곧바로 투석 중단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환자들은 고령이거나 거동이 불편한 경우가 많아 신속한 대피도 어렵습니다. 결국 재난 상황에서 의료 인프라뿐 아니라 사회 기반시설 전반이 신장질환자들에게는 생명과 직결된 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재난 신장학 (Disaster Nephrology)은 무엇을 다루는가?
재난 신장학은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신장질환자, 특히 급성신손상 (Acute Kidney Injury) 환자와 만성신질환 (Chronic Kidney Disease), 투석환자, 이식환자의 치료 연속성과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실천 중심의 학문입니다.
재난 발생 시 신속한 투석 제공, 고칼륨혈증 관리, 수액 조절, 환자 분류, 이송 체계, 환자용 교육자료 등 실제 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내용을 중심으로 연구와 매뉴얼 개발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속에서 구조된 환자들이 '압궤 증후군 (Crush syndrome)'으로 급성 신부전을 겪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이 환자들에게 조기에 수액 공급과 고칼륨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일본, 터키, 시리아, 우크라이나 등의 사례에서 그 심각성이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습니다.
한편, 허리케인 카트리나나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서도 투석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험이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에서는 '투석환자 재난 매뉴얼', '격리 투석 지침', '재난시 응급상황 식이요법' 등을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의 준비는 어디까지 왔을까?
저는 경북 지역의 지진 대응 경험을 바탕으로, 경주·포항 지진 당시의 투석실 피해 상황을 연구하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후 대한신장학회에서는 '재난대응위원회'를 신설하였고, 저는 간사로 참여하며 투석실 화재 대응 매뉴얼, 태풍·정전·단수 대응 지침, 감염병 격리 투석 지침 등을 마련해 왔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보건복지부와 협력하여 '의료기관 화재 대피 지침'에 인공신장실 상황을 반영하고자 노력하였고, 코로나19 확산 당시에도 환자 확진 후 인공신장실 COVID19 대응매뉴얼을 전국 병원과 공유하였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식습관과 식자재를 고려한 투석환자를 위한 한국형 재난대응식이계획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재난대응식이계획은 응급상황 시 혈액투석이 지연되는 경우 적용할 수 있는 식이계획으로, 투석환자에게 조절이 필요한 칼륨을 기준으로 재구성한 식품교환표를 만들어 아래와 같이 환자가 적응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습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대한신장학회 유튜브 (내신장이 콩팥콩팥)를 참고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저는 국제신장학회 (ISN) 산하 Renal Disaster Preparedness Working Group (RDPWG)의 멤버로 국내 최초로 합류하여, 터키·시리아 지진, 우크라이나 전쟁, 하이티 대지진 등 재난 현장의 대응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한국의 경험을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표)식품교환군의 교환단위당 영양소 함량 (콩팥질환 환자용)
◆지금 필요한 것은 '준비'입니다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준비된 의료진과 환자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더 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신장질환자들은 더 이상 단순히 '약한 환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보호해야 할 존재입니다.
환자 스스로도 재난 가방을 준비하고, 응급 식단을 이해하며, 본인의 병력과 투약 정보를 요약해 소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료진은 위기 상황에서도 치료 연속성을 지킬 수 있는 시스템과 교육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국내에서 재난 신장학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그 사회적 가치와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또한 이 분야에서 전국을 선도하며, 나아가 국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계속해서 해 나가고자 합니다.
지금도 전국의 수많은 투석실과 의료진이 묵묵히 이 역할을 해내고 계십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가 한 번쯤은 '재난 상황에서 누가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는가'를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그것이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재난신장학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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